자산어보 영화는 왜 흑백으로 촬영했을까? 이준익 감독이 직접 밝힌 흑백 선택 이유와 컬러 전환 장면의 숨은 의도를 분석합니다. 수묵화 같은 동양미, 파랑새 상징, 40억 제작비의 비밀까지 영화 연출의 모든 것을 파헤칩니다.
자산어보 영화가 흑백으로 촬영된 이유, 이준익 감독의 연출 의도 분석
2021년 개봉한 영화 '자산어보'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왜 흑백 영화일까?" 컬러 영화가 대세인 시대에 126분 전편을 흑백으로 관통한 이준익 감독의 선택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영화의 메시지와 미학을 완성하는 핵심 장치였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짧은 컬러 장면들입니다. 파랑새가 나타나는 순간, 그리고 "흑산이 아닌 자산"이라는 대사와 함께 펼쳐지는 마지막 풍경. 이 모든 연출에는 이준익 감독의 치밀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감독의 인터뷰와 영화 분석을 통해 자산어보가 흑백으로 촬영된 진짜 이유를 낱낱이 파헤쳐보겠습니다.
흑백 선택의 첫 번째 이유: 제작비 절감의 현실적 선택
40억 원으로 완성한 사극의 비밀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자산어보의 흑백 선택에는 예술적 의도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제작 환경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습니다. "최소 100억은 들여야 할 사극 스케일인데 40억으로 한도를 정해놓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이죠.
실제로 자산어보는 극도의 예산 절감 끝에 탄생했습니다. 감독 본인과 설경구, 변요한 배우 모두 다른 영화 출연료의 절반 이하로 개런티를 낮췄고, 한물간 레드 카메라를 저렴하게 빌려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흑백 촬영은 컬러 보정과 색감 작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후반 작업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제약이 만들어낸 예술적 승화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돈이 없어서' 흑백을 선택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작비 제약이라는 한계를 예술적 기회로 전환한 것이 이준익 감독의 탁월함입니다. 흑백이라는 제약 안에서 조명, 구도, 후반 작업에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더 강렬한 영상미를 창출해냈습니다. 현장 스탭들이 몸으로 때운 영화라는 감독의 표현처럼,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물이 바로 자산어보의 흑백 미학입니다.
흑백 선택의 두 번째 이유: 동양적 미학과 수묵화의 재현
흑산도를 수묵화 캔버스로 만들다
이준익 감독이 밝힌 흑백 선택의 가장 중요한 예술적 이유는 바로 '동양적 미학의 구현'입니다. 흑산도라는 미지의 공간을 흑백으로만 표현함으로써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한 웅장한 떨림과 영상미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관객들이 증언하듯, 자산어보의 흑백 화면은 단순히 색이 빠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부한 감정과 깊이를 전달합니다. 하얀 화선지에 먹으로만 칠해진 수묵화를 보고도 깊은 감동을 느끼듯, 흑백의 자산어보는 은은한 전율을 남깁니다. 흑산도의 바위, 파도, 하늘이 흑백으로 표현될 때 오히려 그 본질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역설적 효과가 있습니다.
담백함과 절제의 미학
한국 전통 예술의 핵심은 '여백의 미'입니다. 자산어보는 이 여백의 미를 영화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해낸 작품입니다. 화려한 컬러 대신 흑과 백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인물의 표정, 대사, 관계에 집중하게 됩니다.
특히 정약전과 창대가 나누는 지식의 교환, 신분을 초월한 우정의 순간들은 흑백이라는 담백한 화면 속에서 더욱 진솔하게 다가옵니다. 만약 이 영화가 컬러로 촬영되었다면, 의상의 화려함이나 배경의 색감이 오히려 이야기의 본질을 흐렸을 것입니다. 절제된 흑백 화면은 영화의 주제인 '배움'과 '우정'에 관객을 집중시키는 강력한 장치입니다.
흑백 속 컬러의 등장: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하다
첫 번째 컬러: 창대의 자각
자산어보에서 가장 많은 해석을 낳은 장면 중 하나는 창대가 정약전에게 "벗을 깊이 알면 내가 깊어진다"는 말을 듣고 잠시 컬러가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이준익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했습니다.
"닫혀있던 우물 안 개구리였던 창대가 우물 밖에서 들어온 두꺼비인 약전을 만나고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 장면입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자각하는 순간을 보여주기 위해 잠깐 컬러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창대의 내면 변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흑백 세계에 갇혀 있던 창대가 비로소 세상의 진짜 색깔을 보기 시작한 순간, 영화는 그 깨달음을 컬러로 보여줍니다.
두 번째 컬러: 파랑새의 상징
성게 껍질에서 파랑새가 나오는 장면에서도 파란색만이 화면에 등장합니다. 감독은 이에 대해 "실제 자산어보 원문에서 창대가 '그 파랑새를 밤송이새라고 합니다'라고 표현한다. 흑백 영화다 보니 파랑새를 대사로만 전달하기에는 시각적 아쉬움이 있어서 파란색을 살짝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파랑새는 희망과 순수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창대의 순수한 배움에 대한 열정, 그리고 정약전과 나눈 진실한 우정을 파랑새라는 이미지로 응축해낸 것입니다.
세 번째 컬러: "흑산이 아닌 자산"
영화의 마지막, 창대가 "흑산도가 아니라 자산도"라고 말하는 순간 화면은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됩니다. 이 장면은 자산어보 전체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이준익 감독은 "원래 검기 때문에 검은 것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색이 버무려져서 결과적으로 검게 되는 두 가지 개념이 '검다'는 표현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습니다. 흑산도는 단순히 검은 섬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색깔과 생명이 어우러진 '자산(玆山)', 즉 '이곳의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창대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뀐 순간, 세상은 비로소 컬러로 펼쳐집니다.
흑백 영화의 기술적 도전과 성취
레드 카메라와 후반 작업의 승리
자산어보는 구형 레드 카메라로 촬영되었지만, 결과물은 최신 장비로 찍은 영화 못지않은 퀴�리티를 자랑합니다. 이는 조명 감독, 촬영 감독, 후반 작업 팀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입니다.
흑백 영화는 컬러 영화보다 조명과 구도가 훨씬 중요합니다. 색깔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명암의 대비, 빛의 방향, 인물과 배경의 분리가 정교하게 계산되어야 합니다. 자산어보의 모든 장면은 이러한 흑백 영화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동시에 자연스러운 리얼리티를 잃지 않았습니다.
결론: 흑백이 만들어낸 예술적 완성도
자산어보가 흑백으로 촬영된 이유는 단순히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작비 절감이라는 현실적 제약, 동양적 미학의 구현이라는 예술적 의도,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하기 위한 컬러 대비 전략까지,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선택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자산어보는 백상예술대상 영화 대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휩쓸었고,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극찬을 받았습니다. 흑백이라는 제약이 오히려 영화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고, 컬러 영화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종종 화려한 영상에 현혹되곤 합니다. 하지만 자산어보는 증명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색깔이 아니라 이야기의 깊이이며, 때로는 흑백이 컬러보다 훨씬 더 풍부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산어보를 보면서 흑백 화면이 불편하셨나요, 아니면 오히려 몰입에 도움이 되었나요? 영화 속 어떤 장면의 흑백 표현이 가장 인상 깊었는지 댓글로 의견을 나눠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