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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얼굴이 던지는 질문 - '보이는 것'과 '진실'은 같은가?


 연상호 감독의 2025년 신작 '얼굴'이 제기하는 철학적 화두를 분석합니다. 시각장애 전각장인의 설정을 통해 드러나는 인식론적 질문과 외모 차별의 폭력성, 그리고 현대사회가 여전히 마주해야 할 편견의 구조를 살펴봅니다.


2025년 9월 11일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얼굴'(The Ugly)은 단순한 미스터리 영화가 아닙니다.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제작비 대비 9.6배라는 경이적 흥행을 기록한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불편하지만 반드시 마주해야 할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일 뿐인가?"

40년 전 실종된 아내 정영희의 백골이 발견되면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시각장애인 전각장인 임영규(권해효)와 그의 아들 동환(박정민)이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을 그립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한 가족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철학적 성찰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역설

영화의 가장 탁월한 설정은 주인공 임영규가 시각장애를 가진 전각(도장) 장인이라는 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그는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도장"을 만드는 명장으로 불립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못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것이 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오해입니다. 우리 같이 못 보는 사람일수록 아름다운 게 뭘까 정말 많이 생각해요."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을 압축합니다.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보이는 것'에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영규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기에 다른 사람들의 말과 시선, 즉 '보이는 것'에 의존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아내의 이미지

영규는 아내 정영희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못생겼다", "괴물 같다", "물처럼 생겼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아내의 이미지를 형성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이 왜곡된 이미지를 진실이라고 믿어버렸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영희의 얼굴을 숨깁니다. 관객들은 "도대체 어떤 얼굴이기에 그렇게들 말하는가" 하며 긴장감을 느끼다가, 마지막에 드러난 평범한 얼굴을 보고 당혹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연상호 감독이 노린 지점입니다. 정영희는 처음부터 괴물 같은 외모를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지능이 낮아 일처리가 느리고 눈치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했고, 그 멸시가 외모 비하로까지 이어졌을 뿐입니다.

도장의 상징 - 타인을 낙인찍는 폭력

전각(篆刻), 즉 도장을 만드는 일은 원래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증표를 새기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도장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됩니다.

도장은 타인을 멋대로 규정하고 낙인을 찍는 폭력적 도구로 작동합니다. 영규는 아내를 '추한 여자'라는 사회적 편견 속에 가둬버리고, 그 부정적 이미지를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새겨버렸습니다. 그가 만드는 아름다운 도장은 역설적으로 그의 내면에 있는 추악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영규가 손의 감각을 살리기 위해 전국의 비석을 손으로 만지며 익혔다는 설정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비석은 죽은 자의 이름을 새기는 것, 즉 누군가를 역사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영규는 아내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하기 위해 그녀를 비석에 새겨진 이름처럼 고정시켜버렸습니다.

1970년대 성장 중심 시대의 우화

연상호 감독은 이 영화를 "성장 중심 시대가 지워버린 '얼굴'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습니다. 영화의 배경인 1970년대 청계천 피복공장은 한국 산업화의 상징적 공간입니다.

당시 평화시장에서는 2만 5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했고, 그 중 80% 이상이 여성이었습니다. 열두세 살 어린 나이에 '시다'로 일을 시작해 한 달에 한두 번 쉬고 거의 매일 야근하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이 착취구조에 대한 절규였습니다.

경제 성장이라는 거대 담론에 가려진 개인들

영화 속 임영규는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명장이 된 '인간 승리'의 아이콘으로 다큐멘터리에 담기려 합니다. 하지만 그 빛나는 성공 뒤편에는 희생당하고 지워진 정영희가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압축 성장이 만들어낸 구조적 폭력을 상징합니다. 70년대는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던 '잘 나가던 시대'였지만, 동시에 인권의식이 발달하지 못해 공장 노동자나 장애인 같은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없던 '어두운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성장이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서 개인의 존엄성은 쉽게 무시되었고, 특히 여성이자 지적 장애를 가진 정영희는 이중삼중의 차별 속에서 말 그대로 '지워졌습니다'.

기억의 재구성 -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해 다섯 번의 인터뷰를 통해 진실에 접근합니다. 과거 정영희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하나씩 쌓이면서 관객은 40년 전의 진실을 재구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각자의 기억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정영희를 불쌍한 피해자로, 어떤 이는 귀찮은 존재로, 또 다른 이는 자신의 죄책감을 투영한 대상으로 기억합니다.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자가 보고 싶어 하는 진실만이 존재합니다.

집단의 편견이 만들어낸 비극

영화의 가장 불편한 지점은 명확한 악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영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특정 개인의 악행이 아니라 집단의 편견과 무관심, 그리고 비겁함이었습니다.

피복공장 사장 백주상(임성재)은 당대 보기 드물게 임금 체불도 없고 직원들에게 잘해준다는 평판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정영희를 인간으로 존중하기보다는 일종의 '구제 대상'으로만 바라봤습니다. 다른 여공들 역시 정영희를 직접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무시당하는 것을 묵인했습니다.

이렇게 책임이 안개처럼 흩뿌려진 진실 앞에서 관객은 큰 불편함을 느낍니다. 일부 관객이 "너무 불편해서 별로였다"는 후기를 남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는 연상호 감독이 의도한 불편함이며, 우리 사회의 혐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현재에도 유효한 질문 - 우리는 진짜 '보고' 있는가

영화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메시지는 2025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니, 어쩌면 더 절실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SNS 시대의 외모 지상주의

오늘날 우리는 SNS를 통해 끊임없이 타인의 '얼굴'을 소비하고 평가합니다. 필터를 거친 완벽한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외모가 곧 경쟁력이 되는 사회에서 '못생김'은 여전히 낙인이 됩니다.

채용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외모 평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혜적 시선, '꾸며야 예쁘다'는 압박 등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정영희가 겪었던 폭력을 계속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진실보다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비겁함

영화의 결말에서 다큐멘터리 PD 김수진(한지현)은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결국 양심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합니다. 임영규의 추악한 과거는 묻어둔 채 '장애인이 불굴의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감동적인 스토리로 다큐를 제작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현대사회가 진실보다 '보기 좋은 이야기'를 선호하는 경향을 비판합니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포장된 스토리를 소비하며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성공한 장애인의 이야기는 감동을 주지만, 그 이면의 착취구조나 희생자는 보려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던지는 서늘한 경고

영화 마지막, PD가 동환에게 던지는 "오늘따라 아버지랑 더 닮아 보입니다"라는 대사는 모든 상징을 완성하는 서늘한 경고입니다.

이는 단순히 부자지간의 외모가 닮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덮으려는 아버지의 비겁함, 그 추함이 아들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동환은 진실을 밝히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세계와 시선에 동조하는 공범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박정민의 1인2역(젊은 시절 아버지와 현재의 아들)은 이 전이를 시각적으로 완성합니다. 똑같은 얼굴을 한 두 인물이지만, 한쪽은 추악한 가해자이고 다른 쪽은 진실을 추구하다 결국 포기한 방관자입니다. 결국 둘 다 '추한' 얼굴입니다.

결론 - 영화 제목 'The Ugly'가 가리키는 것

영화의 영문 제목 'The Ugly'는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요? 못생겼다고 손가락질 받던 정영희일까요? 아니면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임영규일까요?

정답은 우리 모두입니다. 타인을 외모로 평가하고, 집단의 편견에 동조하며,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우리 자신의 추악한 민낯 말입니다.

연상호 감독은 '사실'과 '진실'의 경계에서 길을 잃은 인간의 내면을 깊게 응시하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를 집요하게 묻습니다. 마음속 상처와 결핍이 어디에서 오는지, 진정한 사랑과 이해, 소통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이 영화가 2억 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이유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열연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지만 반드시 마주해야 할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진실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습니까? 영화 '얼굴'은 극장을 나선 후에도 오래도록 이 질문을 마음에 남깁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좋은 영화의 조건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