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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실화 조선어학회 사건 완벽 정리, 우리말 사전 편찬의 진실

말모이 영화의 실화 조선어학회 사건을 완벽 정리합니다. 1942년 일제가 탄압한 우리말 사전 편찬의 실제 이야기, 주시경 선생과 조선어학회 학자들의 희생, 그리고 1957년 조선말 큰사전 완성까지 영화와 역사를 비교 분석합니다.

말모이 실화 조선어학회 사건 완벽 정리, 우리말 사전 편찬의 진실

2019년 1월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281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유해진이 연기한 까막눈 김판수가 글을 배우며 우리말의 소중함을 깨닫고, 윤계상의 류정환과 함께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말 사전을 완성하려는 이야기. 하지만 이 영화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실화'에 기반했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실제로 일어난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 중 가장 잔혹한 탄압이었습니다. 오늘은 말모이의 실화인 조선어학회 사건의 전말과 우리말 사전 편찬의 실제 역사, 그리고 영화와 역사의 차이점을 완벽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조선어학회란 무엇인가: 한글 지킴이들의 시작

주시경 선생과 우리말 연구의 출발

조선어학회의 역사는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 선생은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후에도 "나라를 잃었어도 말을 지키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며 한글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한글 문법을 체계화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우리말 사전 편찬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주시경 선생은 1914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38세였습니다. 주시경의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를 이어받아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의 전신입니다.

1929년, 조선어학회로 개칭하다

1929년,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섭니다. 핵심 목표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한글 맞춤법 통일. 둘째, 조선어 큰사전 편찬. 당시 한글은 지역마다, 사람마다 쓰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표준화된 맞춤법도, 체계적인 사전도 없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맞춤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조선어 큰사전 편찬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의 말을 수집하고, 뜻을 정리하고, 용례를 찾는 방대한 작업이었습니다.

'말모이'의 진짜 의미

영화 제목이기도 한 '말모이'는 실제로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 작업에 붙인 이름입니다. '말을 모으다'는 순우리말로, 전국의 다양한 방언과 어휘를 수집한다는 의미입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제주도부터 함경도까지, 각 지역의 교사, 지식인들과 협력하여 낱말을 모았습니다.

1942년까지 무려 16만 4,125개의 표제어를 정리했습니다. 현대 국어사전이 약 50만 단어인 것을 고려하면, 당시 기술과 환경에서 이는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일제의 잔혹한 탄압

사건의 발단: 여학생 기차 사건 조작

1942년 10월,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붕괴시킬 구실을 만들었습니다. 함흥발 경성행 기차 안에서 조선인 여학생들이 조선말로 대화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이 제지했고, 이를 거부하자 학생들을 연행했습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가 학생들을 선동해 독립운동을 했다"고 몰아붙였습니다.

실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일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어학회를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1938년부터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강화하며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창씨개명 강요, 신사참배 강제, 그리고 조선어 사용 금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작업은 이 모든 것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행위였습니다.

1942년 10월, 대규모 검거

1942년 10월부터 1943년까지,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이윤재, 한징, 이희승, 최현배, 이극로, 정인승, 이강래, 김도연 등 당대 최고의 한글학자들이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이들을 서울, 함흥 등지에서 체포해 혹독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는 기본이었고, 추운 겨울 벌거벗겨 물을 끼얹는 고문도 자행되었습니다.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것.

옥사한 두 학자: 이윤재와 한징

고문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두 명의 학자가 옥중에서 숨졌습니다.

이윤재(1888~1943): 조선어학회의 핵심 인물로 사전 편찬의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1943년 1월 16일, 함흥경찰서 유치장에서 뇌일혈로 사망했습니다. 나이 55세. 고문 후유증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한징(1886~1944): 언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1944년 1월 14일, 함흥형무소에서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나이 58세. 그의 시신은 가족에게조차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이 두 학자의 죽음은 일제가 얼마나 조선어 말살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1945년 해방, 그리고 석방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조선이 해방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조선어학회 회원들도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이들은 출소하자마자 사전 편찬 작업을 재개했습니다. 일제가 압수했던 원고를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원고 대부분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성역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원고 상자들을 찾아낸 것입니다. 만약 이 원고가 소실되었다면, 우리말 사전은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1957년, 조선말 큰사전 완성

12년의 추가 작업

해방 이후에도 사전 완성까지는 12년이 더 걸렸습니다. 한국전쟁(1950~1953)으로 또다시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드디어 『조선말 큰사전』 전6권이 완성되었습니다. 주시경 선생이 꿈꾼 지 40년 만이었습니다. 이 사전은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의 토대가 되었으며, 우리 말과 글의 표준을 확립하는 역사적 업적이 되었습니다.


영화 '말모이'와 실제 역사의 차이

영화 속 가상 인물들

영화 '말모이'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대부분의 인물과 사건은 픽션입니다.

김판수(유해진): 까막눈 극장 직원에서 독립운동가로 성장하는 주인공. 완전한 가상 인물입니다. 조선어학회에 문맹인 평민이 참여한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았습니다.

류정환(윤계상): 친일파 아들이지만 조선어학회를 이끄는 인물. 역시 가상입니다. 실제 조선어학회 대표는 이극로, 최현배 등이었습니다.

각색된 사건들

영화는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해 일부 사건을 과장하거나 창작했습니다.

거리 총격 장면: 영화에서 일제 경찰이 조선어학회 회원을 거리에서 총으로 쏘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고문과 옥사는 실제로 있었지만, 공개 총살은 없었습니다.

사전 원고 탈취: 영화에서는 극적으로 원고를 빼앗기고 되찾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실제로는 일제가 압수한 원고가 해방 후 경성역 창고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역사적 사실: 영화가 담지 못한 것들

영화는 2시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많은 것을 생략했습니다.

33명의 체포: 실제로는 33명이 체포되었지만, 영화는 소수의 인물만 다룹니다.

전국적 네트워크: 조선어학회는 제주도부터 함경도까지 전국의 교사, 지식인들과 협력했습니다. 이 방대한 네트워크는 영화에서 충분히 표현되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 12년: 영화는 1945년 해방에서 끝나지만, 실제 사전 완성은 1957년입니다. 그 12년의 노력도 역사의 일부입니다.


결론: 언어를 지킨 사람들, 나라를 지킨 사람들

조선어학회 사건은 총칼이 아닌 '말'로 싸운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의 말을 빼앗으면 정신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목숨을 걸고 우리말을 지켰습니다.

영화 '말모이'는 비록 많은 부분이 각색되었지만, 그 본질은 정확하게 담아냈습니다. "말이 사라지면 나라도 사라진다", "언어는 곧 정체성"이라는 메시지. 이윤재와 한징 선생이 옥중에서 숨지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019년 영화를 본 관객들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단순히 감동적인 스토리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한글,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지켜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말모이를 보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알게 되셨나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학자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지금 우리는 우리말을 잘 지키고 있을까요? 댓글로 생각을 나눠주세요!